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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 연구소

재미있는 한국사 인물 - 조선중기 고승 부휴선사( 浮休禪師)

by 정보문지기 2020. 8. 23.

''눈 희고 달 밝으니 고향 생각 끝이 없네,
방이 싸늘해 잠 못 이루고
나그네 외로이 밤을 지새네.''

선지에 밝은 선승이자 당대 최고
수준의 유학자들과도 교류

부휴선사(浮休禪師, 1543∼1615)는 속성은 김(金)씨이고 법명은 선수(善修)이며 전북 남원출신이다.

부친의 이름은 적산(積山)이고 어머니는
이(李)씨이다. 어머니가 신승(神僧)으로부터
원주(圓珠)를 받는 태몽(胎夢)을 꾸었으며, 어릴 때부터 비린내를 좋아하지 않았고,

부모님에게
“장차 뜬구름 같은 이 속세를 떠나 출가하려 합니다”
고 하더니,

20세에 양친의 허락을 얻어 지리산으로 들어가서 신명장로(信明長老)의 제자가 되었고,

그 뒤 서산대사
청허휴정(淸虛休靜)의 스승이기도 한 부용영관(芙蓉靈觀)의 밑에서 수도하여 심요(心要)를 얻었다.
그 뒤 덕유산·가야산·속리산·금강산 등의 이름 있는 사찰에서 수행 정진하다가

서울로 가서 당시 재상 노수신(盧守愼)의 장서를 7년 간에 걸쳐 독파하는 등 다른 학문을 계속해서 공부하였다.
뿐만 아니라 스님은 필법도 뛰어나 사명당과 함께,
누가 더 나은지 말할 수 없을 정도라고 하여,
당대의 ‘이난(二難)’이라 칭송받았다.

 

 

 


스님은 종문에서도 선지에 밝은 선승으로
인정받았을 뿐 아니라 노수신 등 당대의 최고 수준의 유학자들과도 깊은 교류를 하였다.
또 평생토록 신도들로부터 받은 물건을 하나도 가지는 일이 없고, 모두 필요한 사람에게 나누어 주었다.


광해군 때는 두류산에 있었는데 어떤 미친 승려가 무고하여 투옥되었다가 무죄로 풀려났다.
이를 계기로 광해군이 내전으로 초빙, 설법을 청해 들었다. 스님의 설법을 들은 광해군은 크게 기뻐하며 가사와 장삼,
염주 등을 하사하였다.


또 봉인사에 재(齋)를 설하여 그를 증명으로 삼았다.  


임제선사로부터 내려온 선종의 골수 법맥 계승 임진왜란이 일어나 덕유산 초암에 은신하고 있던 중

왜적 수십 명을 만났다.
뒷짐을 지고 선 그의 앞에서 왜적이 칼날을 휘두르는 자세를 취하였으나, 그가 태연부동하게 있었으므로

왜적들이 크게 놀라 절한 뒤 물러갔다.
이후 가야산 해인사에 머물렀을 때 명나라 장수 이종성이 찾아와서 법문을 듣고 감동하여 며칠 동안 머물렀다.
얼마 뒤 무주구천동으로 자리를 옮겼는데 하루는 <원각경>을 외우고 있을 때 큰 뱀이 나타나서

계단 아래에 누워 있었다. 경을 다 외운 후,
뱀의 꼬리를 밟자 뱀이 머리를 들고 물러났다.

그날 밤 꿈에 한 노인이 절하고는
“화상께서 주신 설법의 힘을 입어 이제 고통의 몸을 여의었습니다”라고 하였다.

송광사 개창비를 보면, “고려 스님 보우가 중국 가무산에 들어가 석옥청공(石屋淸珙)선사의 회상에 참여하였는데,

청공은 임제의현 선사의 18대 적손인바, 보우가 이 법을 남김없이 증득하여 환암혼수(幻菴混修)에게 전하였다.

혼수는 귀곡각운(龜谷覺雲)에게,
각운은 등계정심(登階淨心)에게,
정심은 벽송지엄(碧松智嚴)에게 전했으며,
지엄은 부용영관(芙蓉靈觀)에게,

그리고 영관은 상족(上足) 제자에게 전했는데,
그 이름이 선수(善修)이고 자호는 부휴(浮休)인 바, 내전(內典)을 모두 꿰뚫어 일대의 종사가 되었다.
”고 되어있다. 이로써 부휴선사가 서산대사와 동문의 형제임을 알 수 있음과 동시에,

스님이 임제선사로부터 이어져 내려온 선종의 골수 법맥을 계승한 분임을 알 수 있다. 
부처님이 꽃을 들어 보이신 소식이 끊어졌다고 말하지 마라


사명대사,
"부휴 선사가 아니면 누가 종문의
기강을 바로잡을 것인가" 

부휴스님은 청허와 법형제이지만 나이가 청허보다는 23살 아래이고, 청허의 제자인 사명보다는 1살 많아서,
사명과는 형제처럼 지낸 반면 청허는 스승처럼 존경하였다.

청허와 사명이 왜병을 물리친 호국활동으로 너무나 잘 알려진 것에 비해 스님은 탁월한 선지(禪旨)로 당시의 불교계를 이끌던 대종사였다.

스님은 그 법력과 덕망이 고매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귀의하고자 했던 고승임에도 불구하고 일반인들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지만,

임진왜란 때는 승장(僧將)의 한 사람으로 전쟁터에 나아가 구국에 앞장서기도 했다.
사명의 글을 보면 스님의 법력이 어떠했는지를 알 수 있다. 

 

“부처님의 말씀은 땅에 떨어지고 세상은 헛된 말만 좆아서 집착하니, 이때를 당하여 영산(靈山)이 어찌 평안하겠으며,

소림(少林)은 어느 날 생기를 되찾을 것인가.
지금은 오직 정안(正眼)을 가진 나의 형님(부휴선사)이 있을 뿐이니, 형님이 아니고서는 누가 이 종문의 기강을 바로잡을 것인가?”  

위의 글은 사명이 나라의 위급함을 구하기 위하여 동분서주하다보니, 종문의 본분사에 충실할 수 없음을 안타깝게 여긴 나머지 이를 은근히 자기가 마음으로 인정하고 존경하는 부휴선사에게 당부한 것이다.  


조주의 ‘무자화두’를 참구할 것을 강조한 스님은, 수선(修禪)의 방법으로 심산(深山)에서의 정좌(靜坐)를 제일(第一)로 삼았다.


스님은 설파한다. 

“이 가운데 소식을 누가 알 수 있겠는가.
크게 분발하여 간절히 의단(疑團)을 일으키니.
일성(一聲)에 천지가 무너지거늘 어찌 북쪽바다,

남쪽 땅을 논의할 것인가.
도는 다른데 있지 않고 오직 나에게 있으니 부디 먼 곳에서 구하지 말라.

마음을 거두고 산창(山窓) 밑에 조용히 앉아 낮과 밤으로 조주선을 참구하라.
사람마다 충천(衝天)하는 기운이 있으니 이를 일념회광(一念廻光)이라고 한다.

일념회광하면 곧 대장부이다.
부처님이 꽃을 들어 보이신 소식이 끊어졌다고 말하지 마라.
비가 지나간 뒤에 산새들이 다시 서로 부른다.”  

진실한 구도심은 위기의 순간에 더욱 치열해진다는 것 몸소 증명 

흔히 말법시대에는 참선(參禪)을 해도
소용없다고 말한다. 시대가 혼탁하고 중생의 근기가 어둡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스님에 의하면 이것은 스스로 발심구도하지 않고, 그 책임을 시대에 돌리려는 것이고,

자기 자신을 중생일 수밖에 없다며 스스로를 자굴(自屈)하는 것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진실한 구도심은 오히려 위기의 자각에서 더욱 치열해질 수가 있기 때문이다.

1614년에는 조계산 송광사에서 지리산 칠불암으로 거처를 옮겼으며, 다음해 7월 제자
각성(覺性, 1575∼1660)에게 법을 전하였다.

그 해 11월 1일 시자에게 지필묵을 가져오도록 하여 다음과 같은 임종게를 남기고 입적하였다.
“73년 동안 허깨비 바다에 노닐다가,
오늘 아침 껍질을 벗고 처음으로 돌아가네.

일체가 공적하여 원래 아무것도 없음이 확연하니,
어찌 깨달음과 생사의 뿌리가 있겠는가.”
이때 나이 73세, 법랍 57세였으며 저서로는 <부휴당대사집>이 있다.

스님의 법은 벽암각성(碧巖覺性) 등에게
전해졌으며, 제자가 7백여 명에 이르렀다.

 

 


스님 입적 후 그의 제자들은 벽암을 비롯해
뇌정응묵(雷靜應黙),
대가희옥(待價希玉),
송계성현(松溪聖賢),
환적인문(幻寂印文),
포허담수(抱虛淡水),
고한희언(孤閑熙彦) 등 7개 문파로 나뉘어 크게 번창했다.

서산대사 청허에게서 사명과 같은
걸출한 제자가 나와 청허의 법예를 드높인 것처럼, 스님에게는 벽암이라는 뛰어난 제자가 나와,
뒷날 서산문하와 필적하는
부휴계를 형성하였다.

이덕진 / 창원문성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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