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이야기 연구소

재미있는 한국사 인물 - 세종의 여섯째 아들이며 단종의 숙부, 수양대군(세조)의 동생

by 정보문지기 2020. 7. 27.

금성대군 [ ]

 

이름은 유(). 어머니는 소헌왕후 심씨. 세종의 여섯째 아들이며 단종의 숙부, 수양대군(세조)의 동생이다.

1433년(세종 15) 금성대군으로 봉해지고, 1437년 자식이 없는 방석()의 후사로 입적되었다.

1455년(단종 3) 수양대군에 의해 모반혐의로 삭녕()에 유배되었다가, 다시 광주()로 이배되었다. 1456년(세조 1) 성삼문 등 사육신이 중심이 된 단종복위운동이 실패하자, 이후 유배된 순흥()에서 순흥부사 이보흠()과 함께 모의하여 군사를 모으고 의병을 일으켜 단종의 복위를 꾀하려고 하였으나,  거사하기 전 관노의 고변으로 사사()되었다. 세종의 아들 8명 중 수양대군의 모반에 반발하여 분기했던 유일한 인물이었다.

 

 

 

세종은 그를 총애하여 계속 그의 집에 거처하거나 이어하기도 했다. 1440년(세종 22년) 6월 경 한때 창진(瘡疹)에 걸려 생명이 위독하기도 했다. 그러나 기적적으로 그의 병환이 나았고, 세종은 그를 치료한 의관들과 관련자들에게 크게 상을 내린다.

1444년과 1445년에는 세종이 병이 있어 금성대군의 사저에서 정양하였다. 1445년 세종의 명을 승정원에서 전달받아 임영대군(臨瀛大君)과 함께 화포(火砲) 제작의 감독을 맡아보았다. 1449년(세종 31) 10월 세종이 병석에 눕게 되자 그의 집에 거동하여 2개월간 체류하다가 나중에 영응대군의 사저로 이어하였다.

그는 불교 신자였고 사찰에 후원을 하기도 했다. 1452년(문종 2년) 한때 문종의 병환이 위독해지자 병환을 낫도록 축원케 하도록 사찰에 파견될 계획이 세워졌으나 중간에 취소되었다. 1452년에 단종이 즉위하자 형인 수양대군과 함께 즉위한 단종에 의해 사정전으로 호출되었다. 이때 단종에게 친히 물품을 하사받으면서 좌우에서 보필할 것을 약속하였다. 그해 수양대군은 금성대군과 화의군, 계양군을 불러낸 뒤 이현로(李賢老)에게 심하게 매질을 하고 구타하였다. 그리고 '이현로는 반드시 장차 일을 일으킬 것이므로 내가 심히 염려한다. 너희들은 이를 알라'고 하였다. 그러나 1453년 수양대군이 정권탈취의 야심을 가지고 한명회, 신숙주 등과 결탁하여 안평대군을 숙청하고 단종의 보필대신인 김종서 등을 제거하자, 형의 행위를 반대하고 조카를 보호하기로 결심한다.

 

 

위리안치지(圍籬安置地)란 사형수가 사형이 집행될 때까지 중죄인을 구덩이에 가두고 그 주변을 탱자나무나 가시덤불로 둘러싸 외부와 격리시키고(圍籬) 감시인을 두며, 그 안에 가두어(구금) 둔 곳(安置地)을 말한다. 금성대군도 같은 고초를 당하였는데, 안치 형벌중 위리안치(圍籬安置)는 가장 무거운 형벌이다.

성삼문 등 사육신의 단종복위운동에 연루되어 경상북도 순흥으로 유배되었고, 그곳에서 다시 순흥부사 이보흠(李甫欽)과 함께 단종의 복위를 도모하다가 기천현감(基川縣監)의 밀고로 사형을 당했다.

이 사건으로 금성대군과 이보흠은 물론 순흥부의 일부 백성들까지 목숨을 잃었고 순흥부 또한 폐지되었다.

조선 후기 숙종 때 금성대군과 함께 순절한 모든 사람이 신원(伸怨)되고 순흥부도 부활되었다. 

1719(숙종 45)년에 순흥부사 이명희(李命熙)가 금성대군의 유허지(遺墟址)에 우선 금성대군신단(錦城大君神壇)을 마련하고 단종복위 운동으로 희생된 금성대군, 이보흠, 관련순절자 등을 배향하였다.

금성대군 위리안치지는 최근인 2000년에 이르러서야 복원되었는데, 지금의 경상북도 영주시 순흥면 내죽리의 소수서원(紹修書院) 근처(민속마을 선비촌 인근)에 복원되어 있다. (위치에 대한 이론이 있음). 

 


그는 조카 단종이 즉위하면서 단종을 지지하는 입장에 있었는데, 이것이 친형 수양대군(세조)의 반감을 샀다.

1455년(단종 2년) 1월에는 영의정 수양대군을 비롯한 여러 대신들이 왕족들이 그의 집에서 활쏘기 시합을 한 것을 구실삼아 탄핵하였다.

 

그리하여 그 해 2월 고신을 박탈당하고 유배령이 내려졌으나 무죄로 판결받고 고신을 되돌려받는다. 1455년(단종 수양대군에 의해 파당을 만들고 무사들과 결탁해 모반을 하려 한다는 혐의로 삭녕군에 유배되었다가, 얼마 뒤 경기도 광주군으로 배소가 옮겨졌다.

 

또한 그는 세종의 후궁이면서 단종의 세손시절 그를 양육한 혜빈 양씨와 가깝게 지냈는데, 화의군 이영 등과도 연결되어 수양대군 사살을 도모했다고 실록에 기록되어 있다. 세조 즉위 후인 1455년(세조 1년)에 단종이 금성대군의 집에 있었던 적이 있다 하여 경상도 순흥(현재의 경상북도 영주시)에 안치되고, 그의 재산 및 노비는 모두 몰수당했다.

 

 

금성대군의 묘소를 찾던 순흥부의 주민들은 금성대군이 사약을 받고 사사된 곳에서 그의 혈흔이 묻은 돌을 발견하고 주변에 단을 쌓고 제사를 지냈다. 이를 금성단이라 한다. 그가 한때 머물렀던 충청북도 진천군 초평면 용기리 416번지에도 그의 사당이 세워졌다. 충청북도 청원군 미원면 대신리에는 증손 흥양부정이 그의 부인 최씨의 묘소를 이장한 뒤, 그 옆에 그의 가묘를 만들고, 근처에 그의 신도비가 세워졌다.

 

그 뒤 중종조에 와서 금성대군의 증손 이의가 왕에게 청을 올려, 금성대군의 억울함을 주장하였다. 이를 옳게 여긴 중종은 1519년(중종 14년), 금성대군의 자손 3대에게 관작을 봉하고 승습의 명을 내렸다는 기록이 있다.

1519년(중종 14) 그의 증손자 이의가 대궐 문앞에 짚자리를 깔고 3개월간 궐문 주변에서 금성대군의 억울함을 큰소리로 부르짖었다. 이때 중종에게 경전을 강의하던 모재 김안국(慕齋 金安國)이 중종에게 아뢰기를 "금성대군은 왕조의 가까운 친척이요. 사죄(赦罪)하지 않아서 그 자손들이 아직도 그 죄목에 묶여 있으니 불가하다고 사료되나이다. 너그럽게 용서하소서."라고 상주하여 중종의 마음을 움직여 노비에서 해방되시켰다. 이때 아들 작위를 박탈당한 화원군 이맹한은 1519년(중종 14년)에 특명으로 함종군(咸種君)에 봉작되고 손자 이연장은 동평군(東平君)에 추증되었으며, 이인, 이의, 이례 3형제에게는 덕양부정, 홍양부정, 청리부정의 작위가 하사되었다.

이후 금성대군의 관작이 숙종조에 들어 복구되고 영조 때 정민(貞愍)의 시호가 내려졌다. 정조 때에는 그의 자손들이 종친으로써 대접을 받아 제사를 지낼 수 있게 되었다. 진천 청당사(靑塘祠), 순흥 도계서원(道溪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현재도 금성대군을 기리는 여러 사적지에서 그에게 사사 명령이 내려진 음력 10월 21일을 기일로 보고, 봉사손들이 중심이 되어 제사를 지내고 있다.

위키백과

 

사업자 정보 표시
상생공인중개사사무소 | 김재범 | 세종특별자치시 한누리대로 2022(소담동, 아이콤스타타워)102호 | 사업자 등록번호 : 338-11-00968 | TEL : 044-866-4587 | Mail : c920685@naver.com | 통신판매신고번호 : 호 | 사이버몰의 이용약관 바로가기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