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이야기 연구소

재미있는 한국사 인물 - 중국의 명문장가 사마천ㆍ한유ㆍ유종원ㆍ구양수에 비유되었던 ( 강희맹 姜希孟)

by 정보문지기 2020. 7. 25.


웅장 심오하고 우아(優雅) 건실함은
사마자장(司馬子長, 사마천)과 같고,
넓고 크고 뛰어나기는 한퇴지(韓退之, 한유)와
같으며, 간결하고 예스러우면서 정밀하기는 유유주(柳柳州, 유종원)와 같았고,

빼어나고자유분방하기로는 여릉(盧陵)의 문충공(文忠公, 구양수)과 같아서

당시 선비들의 추앙을 받았다.


중국의 명문장가 사마천ㆍ한유ㆍ유종원ㆍ
구양수에 비유되었던 

강희맹(姜希孟, 1424~1483).
그는 당시에 문병(文柄)을
장악했던 서거정(徐居正, 1420~1488)과 절친한 사이였으며,
경사와 전고(典故)에 통달한 조선 초기의 뛰어난 문장가였다. 

동시에 강희맹은 노련한 정치가로서의 면모도 보였다.

3차례 공신에 책봉되었고,
왕의 총애와 신임 속에서 원자(元子)를 보양(保養)하였으며,

여러 관직을 거쳐 궁극에는 종1품인 좌찬성에 이르렀다.

형 강희안(姜希顔, 1417~1464)과 함께 조선 전기 형제 문장가로도 명망이 높았다.


강희맹은 진주(晉州) 강씨로 조선 초기 시 글씨 그림으로 유명한 강희안의 동생이다.

세종 29년(1447) 24세 때 문과에 급제한 후 여러 관직을 거쳐

의정부에서 일반정사를 처리하는 좌찬성에 이르렀다.

박학다식하며 공정한 정치를 편다는 평을 받았다. 유교 경전과 역사,
중요한 의례에 밝아 신숙주 등과 함께 {세조실록}과 {예종실록}을 편찬하였으며 {동문선}
{동국여지승람} {국조오례의} 편찬에도 참여하였다.

그림에도 재주가 있어 그가 그린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 [독조도(獨釣圖)]가 현재 일본에 남아 전하고 있다.

52세 때인 성종 4년(1475) 관직에서 물러나

장인 안숭효가 준 약 1만㎡의 땅을 근거로 금양(조선 시대 시흥의 행정지명)에 와서 살게 된다.

이곳에서 {금양잡록}이라는 중요한 농서를 썼다.
강희맹의 묘역 구조는 봉분(封墳) 앞에
묘비(墓碑) 혼유석(魂遊石) 상석(床石)
향로석(香爐石)을 놓고,
상석앞의 좌우에 문인석(文人石)을 1쌍 세웠다.

신도비는 종2품 이상의 공신이나 훌륭한 학자에게 허용되었던 것으로

묘의 아래에 가까이 세웠다.


신도비는 서거정(徐居正)이 비문을 짓고
박증영(朴增榮)이 글씨와 전액(篆額)을 써서 성종 19년(1488)에 건립되었다.


네이브캐스트
한국향토문화대전자사전

 

사업자 정보 표시
상생공인중개사사무소 | 김재범 | 세종특별자치시 한누리대로 2022(소담동, 아이콤스타타워)102호 | 사업자 등록번호 : 338-11-00968 | TEL : 044-866-4587 | Mail : c920685@naver.com | 통신판매신고번호 : 호 | 사이버몰의 이용약관 바로가기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