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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 연구소

재미있는 한국사 사찰 - 내장사 內藏寺

by 정보문지기 2020. 9. 6.

백제 무왕 37년(636)에 영은(靈隱)조사가
영은사라는 이름으로 창건했다고
연꽃잎처럼 벌어진 내장산 연봉의 한가운데에
폭 안겨, 내장산이 철철이 주는 자연경관을 마음껏 누리는 자리에 내장사가 있다.

 

 



영조4년에 주조된 동종
유곽은 각각 당초문을 새긴 사각 띠로 둘러싸고, 그 안에 3단 3열의 종유(鐘乳)가 정연히 배열되어 있다. 각 종유 주위는 둥근 연화문(蓮花文)이 받치고 있다.

유곽과 유곽 사이에는 2구의 보살입상을 배치하고,
그 아래 둥근 모양의 꽃무늬 당좌(撞座)가 2개 있다. 당좌 사이에
"乾隆三十三年戊子十月施主趙漢寶全南長興步林寺鑄成(건륭33년 무자10월 시주조한보 전남장흥보림사주성) 云云"
하는 종기(鍾記)가 있다.

조한보가 부친의 복을 빌기 위하여 조성하였다는 내용이다. 건륭 33년은 조선 영조 4년(1768)으로,
이 종이 주조된 해를 말해 준다.

763m의 신선봉을 주봉으로 서래봉, 연지봉, 까치봉, 장군봉 등 높이 650m 이상의 연봉들을 거느린 내장산은 남원의 지리산, 영암의 월출산, 장흥의 천관산,

부안의 변산과 함께 예로부터 호남의 5대 명산으로 꼽혀왔다. 무엇보다도 단풍이 유명하지만 그 밖에도 비자나무 숲과 굴거리나무 군락 등을 포함하여 숲이 매우 아름다운 산이다.

사지가 없어서 창건 연대 등을 정확히 알기가 어렵지만, 전해오는 데 따르면 내장사는
백제 무왕 37년(636)에 영은(靈隱)조사가
영은사라는 이름으로 창건했다고 한다.

 

 



그후 고려 숙종 3년(1097)에
행안(幸安)선사가 당우와 전각을 중수했고,

조선 명종 22년(1566)에 희묵(希默)대사가 법당과 요사채를 중수하면서 절 이름을 내장사로 고쳤다. 임진왜란 때 전소된 것을

인조 17년(1639)에 부용(芙蓉)대사가 재건한 후
몇 차례의 중수를 거치며 이어져왔으나 한국전쟁 때 완전히 불타버렸다. 내장산을 품은 노령산맥이 전투지역이었기 때문이다.

한편, 영은사의 명칭이 내장사로 바뀐 것이 아니라 영은사터에 내장사가 들어앉은 것이라 하기도 한다.
옛 내장사는 백제 의자왕 20년(660)에
유해(幼海)선사가 초창한 절이며,

지금의 내장사가 있는 곳은
본래 영은사 자리라는 것이다.

내장사라고 하면 열에 아홉은 단풍을 연상하듯,
절 입구에서 뒤편의 서래봉에 이르는 대협곡에 단풍이 물들 때의 아름다움은 가히 일품이다.

단풍길은 일주문을 들어서면서부터 시작되는데, 천왕문과 문루를 지나면 오래 묵은 단풍나무 한 그루가 절 마당 한귀를 지킨다.

이 절 일주문 기둥은 한아름이 넘을 듯한 통나무를 잔가지 치고 껍질만 벗겨서 그대로 써, 마치 장사의 다리처럼 튼튼하다.

천왕문, 문루, 대웅전, 극락전 등 지금의 절 건물들은 1950년대 이후에 하나하나 다시 지은 것들로 옛맛은 전혀 없지만 대체로 분위기가 조신하고 포근하다.

다만 근래에 큰 석등을 세웠고 커다란 삼층석탑을 조성하는 중인데, 부디 이 절이 가진 장점을 더욱 돋우는 방향으로 변해가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또한 이 절에는 영조 44년(1768)에
조한보라는 사람이 부모의 명복을 빌기 위해 보림사에 시주했다는 명문을 지닌 조선 시대 동종이 있는데,
현재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49호로 지정되어 있다.

내장산과 내장사를 자주 다닌 사람들은 단풍철보다도 오히려 초여름의 신록을 더 치기도 하고,

한겨울 눈에 덮여 더욱 돋보이는
비자나무 숲과 함께 고요한 그리움과 정감이 고이는 내장사를 더 사랑하기도 한다.

한때는 50여동의 대가람이 들어섰던 때도 있었지만, 정유재란과 6.25때 모두 소실되고 지금의 절은 대부분 그 후에 중건된 것이다. 금산사와 함께 전라북도의 대표적인 절이다.

내장산 산봉우리들이 병풍처럼 둘러싼 가운데에 자리잡아 주변경치가 매우 아름다우며,

특히 가을철 단풍이 들 무렵의 절 주변의 아름다움은 이루 말할 수 없다. 백양사, 방장산, 장성호, 담양호 등이 주변에 있고 주요문화재로는 내장사 이조등종이 보존되어 있다.

[내장사조선동종]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49호(1974년 09월 27일 지정)
내장사에 있는 조선 후기의 동종으로 고려 후기 동종에서 보이는 일반적 양식을 갖추고 있다.

내장사가 중건된 후 전라남도 보림사(寶林寺)에서 옮겨온 것이다. 일제 말기에는 놋쇠 공출을 피하여 원적암(圓寂庵)에 감추었고,

한국전쟁 중에는 정읍시내 포교당에 피난시켜 보전을 꾀하였다. 높이 80㎝, 종신길이 60㎝, 구경 50㎝의 소형이나 명문(銘文)이 확실한 조선 후기 범종의 특징이 잘 나타나 있다.

전북유형문화재 제49호로 지정되었다. 모양은 마치 김치독을 엎어놓은 것 같은 형태를 취하고 있다. 배부분[鐘腹]과 견대(肩帶), 구연대(口緣帶)도 확연하며,
문양대에도 4개의 유곽(乳廓)을 배치하였다.

배부분에 비천상(飛天像) 대신 보살상을 양각 *
종정(鐘頂)에는 네 발로 천판(天板)을 딛고 용틀임하듯 구부린 용으로 용뉴를 만든 것이나 그 옆으로 음관을 낸 것도 격식대로이다.

 



다만 배부분에
비천상(飛天像) 대신 보살상을
양각한 것이 다를 뿐이다.
견대(肩帶)는 두 줄의 띠로 구분하여, 윗띠에는 당초문(唐草紋)을,

아랫띠에는 윗띠의 돌출 부분을 따라
여의두문(如意頭紋)을 배열하였다. 견대 밑에는 24개의 작은 원 문양을 돌리고,
그 안에 범자(梵字)를 양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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