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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 연구소

재미있는 한국사 - 발해의 마지막 태자 - 대광현(大光顯)

by 정보문지기 2021. 1. 9.

대광현(大光顯)은 발해의 마지막 태자다.
태씨(太氏)와 대씨(大氏)는 대광현을 시조(始祖)로 본다.

발해가 거란에 의해 멸망할 즈음에, 발해국의 세자 대광현(大光顯)이 장군 신덕(申德), 예부경(禮部卿) 대화균(大和鈞), 균로사정(均老司政) 대원균(大元鈞), 공부경(工部卿)

대복예(大福譽), 좌우위장군(左右衛將軍) 대심리(大審理), 소장(小將) 모두간(冒豆干), 검교(檢校) 개국남(開國男) 박어(朴漁), 공부경(工部卿) 오흥(吳興)이 그 남은 사람을 거느리고 수만 호가 도망하여 고려로 귀부하였다. 

태조 왕건(太祖 王建)은 후하게 대접하여, 대광현에게 왕씨 성과 계(繼)라는 이름을 하사하고, 종적(宗籍)의 반열에 들게 하였다.
또, 원보(元甫)의 벼슬을 받아 백주(白州)를 지키면서 집안 제사를 지내게 되었다.

협계 태씨, 영순 태씨의 족보에서는 고려 태조가 그에게 태씨(太氏) 성을 하사했다고 전한다. 남원 태씨, 나주 태씨, 밀양 태씨 모두 그에게서 분파된 후손이라고 주장한다.

 



망명 시기

대광현의 망명 시기는 여러 기록들이 하나로 합치하지 않는다.
그 이설들은 다음과 같다.고려사 태조 세가: 태조 17년(934)
가을 7월 고려사 연표: 태조 천수8년(925)고려사절요: 태조
 8년(925) 고려사와 고려사절요에서는 대광현이 발해의 세자라고만 전하고 그 부왕의 이름은 전하지 않는다. 

고려사 태조 세가에 발해가 망한 926년에서 한참 지난 934년에 망명하였다는 기록에 착안하여, 정약용은 저서 발해속고(渤海續考)에서 대광현은 대인선의 세자가 아니고 발해국 멸망 후 유민과 함께 약 10년간 항거하다가 소식이 끊긴 그의 아우일 것이라는 주장을 하였다.

현대에서는 후발해국(後渤海國)
대씨 정권의 세자로 보기도 한다. 

고려사와 고려사절요에서 성종과 현종 시기에 
대도수(大道秀)의 기록이 보이지만,
대광현과의 관계는 알 수 없다.
한국의 태씨 족보에서는 대광현의 아들이라 주장한다.

부왕 : 대인선(大諲譔)
형제 : 대화균(太和鈞), 대원균(太元鈞)


대씨(大氏)가 태씨(太氏)로 바뀐 연유에
대해서는 두 가지 설이 있다.

첫째, 발해가 멸망한 뒤 934년(태조 17)에 세자 대광현(大光顯)이 발해유민 수만 명을 이끌고 고려로 망명하자, 고려 태조가 이들을 후하게 대접하고

그에게 원보수(元甫守)의 벼슬과 함께 태씨(太氏)를 하사하였다는 것이다.

둘째, 『동국통감(東國通監)』에서 대조영을 태조영(太祚榮)이라 한 후로
자손들이 태씨를 칭하였다는 것이다.

본관

협계(俠溪)는 황해도 신계군(新溪郡) 일원의 옛 지명이다. 태씨는 1930년도 국세조사 때 총 1,043가구가 있었는데 그 과반수인 568가구가 함경도에 거주하고 있었다.

분파

태씨는 협계(陜磎), 영순, 남원(南原), 나주(羅州), 밀양(密陽) 등을 관향으로 삼고 있으나 모두 한 뿌리에서 갈라진 것이다.

인물

태귀생(太貴生) : 자는 여인(汝仁)이고,
호는 정기제(正己齊)이다. 본관은 협계(俠溪)이며, 전라북도 남원(南原) 출신이다.

판서(判書) 태응진(太應辰)의 후손이며,
부친은 수문장(守門將) 태윤민(太潤民)이다.
계략이 담대하였고 말타기와 활쏘기에 뛰어났다.

1555년(조선 명종 10) 무과에 급제하여
주부(主簿)가 되었다.

임진왜란 때 서제(庶弟)인 태천생(太賤生),
아들 태상문(太尙文) 등과 함께 의병과
의곡(義穀)을 모아 군진(軍陣)으로 보내었다.

정유재란 때는 종족 및 수십 명의 종들을 이끌고 남원성(南原城)에 들어가 전라병사(全羅兵使) 이복남(李福男)과 더불어 성을 사수하다가 아우 태천생과 함께 전사하였다.

이후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에
녹훈(錄勳)되었다.

태상문(太尙文) : 자는 진옥(振玉)이고 호는
삼현정(三縣亭)이다. 본관은 협계(俠溪)이며 전라북도 남원(南原)에서 태어났다.

판서(判書) 태응진(太應辰)의 후손이다.
조부는 수문장(守門將) 태윤민(太潤民)이고,
부친은 주부(主簿) 태귀생(太貴生)이다.

정유재란 때 아버지 태귀생, 숙부(叔父)
태천생(太賤生)과 함께 남원성(南原城)에 들어가 성을 사수하였다. 전사한 아버지와 숙부의 시신을 수습하여 성 밖에서 매장하고 돌아오자 성은 이미 함락되고 말았다.

그 후 무과에 급제하고 1642년(조선 인조 2)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서제(庶弟)
태팔회(太八回)와 조카 태복련(太福連)과 함께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뒤에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으로
녹훈(錄勳)되고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에
증직되었다.

 



시조는 고구려 유민 출신의 걸걸중상(乞乞仲象)이며, 족보에서는 대중상이라고 한다.

698년 고구려무장(武將)이었던
걸걸대중상(乞乞仲象)의 아들 대조영(大祚榮)이 고구려 유민을 지배층으로 발해(渤海)를 세웠다. 

걸걸중상과 대조영의 후손들은 대씨(大氏)와
태씨(太氏)로 분적했다.
시조 태집성(太集成)은 걸걸중상(乞乞仲象)의
후손인 태화균(太和鈞)의 8세손이다.

태집성은 고려 고종 때
서북면병마사(西北面兵馬使)가 되어 몽고군을
격파한 공으로 협계군(俠溪君)에 봉해졌다.

후손들이 태집성을 중시조로 하고 협계를 본관으로 하여 세계를 이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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